7년과 13년 사이
성경은 두 개의 숫자를 아무 설명 없이 나란히 놓습니다. 성전 7년, 왕궁 13년. 성경 기자는 어떤 평가도 덧붙이지 않습니다. 다만 숫자를 붙여 놓고 우리에게 읽으라고 합니다.
오해하지 맙시다. 기간이 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사람을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왕궁은 여러 건물이 결합된 복합 단지였고, 그럴 만한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 두 숫자를 나란히 배치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배치 앞에서 잠시 멈춰 서야 합니다.
시간은 정직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한다고 말하는지보다, 무엇에 시간을 쓰는지가 더 정확한 고백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감정입니다.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삼는다고 말하면서 그분을 위한 시간이 늘 마지막에 남는 자투리라면, 우리의 신앙고백과 우리의 달력은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 인생의 시간표를 정죄하지 말고 그저 정직하게 바라봅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발하시려고 이 숫자를 남기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돌아보게 하시려고 남기셨습니다.
묵상 질문
지난 한 주,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쓴 세 가지는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 시간표 사이에 어떤 간격이 있습니까?
그 간격을 좁히기 위해 이번 주에 바꿀 수 있는 아주 작은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오늘의 묵상을 적어보세요
오늘의 기도
시간의 주인 되신 하나님, 제 입술의 고백과 제 달력이 다른 말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 정죄가 아니라 은혜로 저를 돌이켜 주옵소서. 오늘 하루의 시간부터 주님께 드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재판하는 주랑
왕궁 단지의 중심에는 재판하는 주랑이 있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재판석은 단순한 법정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사람의 생사를 결정하는 자리, 곧 통치권과 생명 여탈권을 가장 강력하게 과시하는 상징적 공간이었습니다. 백향목으로 마루를 덮었다는 세부 묘사가 그 무게를 말해 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람이 어떤 기도로 시작했는지 기억합니다.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 하나님은 그 기도를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사람은 재판을 건축하고 있습니다. 지혜를 구하던 무릎이 지혜를 전시하는 건물이 되었습니다.
은혜는 처음에는 주신 분을 향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미묘하게 방향이 바뀝니다. 아이가 처음 상장을 받았을 때의 기쁨은 종이가 아니라 잘했다고 말해 주는 부모의 얼굴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장이 액자에 들어가 벽에 걸리는 순간, 그것은 기쁨의 흔적이 아니라 증명의 도구가 됩니다. 손님이 오면 그 앞에서 걸음이 잠시 멈춥니다.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는 지금 어디를 향해 있습니까? 여전히 주신 분을 가리키고 있습니까, 아니면 받은 나를 증명하고 있습니까?
묵상 질문
하나님께 받은 은사나 응답 가운데, 어느새 나를 증명하는 도구가 되어 버린 것이 있습니까?
내가 사람들 앞에서 가장 드러내고 싶어 하는 나의 "재판하는 주랑"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다시 하나님께 돌려 드리려면 무엇을 내려놓아야 합니까?
오늘의 묵상을 적어보세요
오늘의 기도
지혜의 근원 되신 하나님, 주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제 자리를 세우려 했던 교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은혜를 액자에 넣어 걸어 두지 않게 하시고, 날마다 주신 분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 양식이 동일하며
한 절 안에 같은 말이 두 번 반복됩니다. "그 양식이 동일하며", "이 주랑과 같더라." 무엇의 양식입니까? 재판하는 주랑의 양식입니다. 그것이 어디까지 갔습니까? 자기가 잠자는 집까지, 그리고 아내가 사는 집까지 갔습니다.
이것은 건축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은 이제 어디에서도 왕이었습니다. 정무를 볼 때만 왕이 아니라 잠자리에 들 때도 왕이었고, 아내를 대할 때도 왕이었습니다. 재판정의 논리로 가정을 다스렸고, 판결의 언어로 사랑을 대했습니다.
삼천 년 전 이야기가 아닙니다. 직장에서 쓰던 성과의 언어를 그대로 집에 가져와 자녀를 평가하고, 세상에서 익힌 서열의 감각을 그대로 교회에 가져와 형제를 재는 일이 얼마나 흔합니까? 우리가 가장 오래 앉아 있던 자리의 양식이, 결국 우리 삶 전체의 양식이 됩니다.
가정은 법정이 아닙니다. 교회도 법정이 아닙니다. 그곳은 판결이 아니라 은혜가 흐르는 곳입니다. 오늘 우리 집의 양식은 무엇으로 지어져 있습니까?
묵상 질문
내가 밖에서 배운 언어와 태도 가운데, 집이나 교회로 그대로 가져온 것은 무엇입니까?
가장 최근에 가족이나 지체를 "판결"했던 순간을 떠올려 봅시다. 그때 필요했던 말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한 사람에게 건넬 축복의 말 한 문장을 지금 적어 보십시오.
오늘의 묵상을 적어보세요
오늘의 기도
은혜의 아버지, 제 안에 세워진 재판석을 허물어 주옵소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차가운 언어를 썼던 저를 용서하시고, 오늘 제 입술에 축복의 말을 담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궁색한 변명
성전 기구를 만들 장인을 두로에서 데려옵니다. 이름은 히람, 이방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굳이 그의 어머니가 납달리 지파 과부였다고 덧붙입니다. 왜 모계를 밝힐까요?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일에 이방인의 손을 빌린다는 것에 대해 백성 안에 정서적 거리낌이 있었을 것입니다. "완전한 이방인은 아니다. 어머니 쪽으로는 우리 사람이다." 궁색한 변명입니다. 이방인을 썼다는 사실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고레스도 쓰셨습니다. 문제는 순서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먼저 구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좋아 보이는 것을 먼저 가져다 놓고 그 뒤에 신앙적 명분을 붙였다는 것입니다.
더 깊은 문제는 그 설계도 전체에 드리운 애굽의 그림자입니다. 바로의 딸을 위한 집, 애굽식 궁정 구조. 신명기 17장이 왕에게 금한 세 가지 — 애굽으로 돌아가지 말 것, 아내를 많이 두지 말 것, 은금을 쌓지 말 것 — 을 솔로몬은 모두 어겼습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이 구원받아 나온 곳입니다. 그 애굽과 다시 사돈을 맺은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결정은 이미 세상의 계산으로 다 내려놓고, 그 다음에 "기도해 보니 평안이 있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명분이 아니라 우리의 순서를 보십니다.
묵상 질문
최근에 내린 중요한 결정에서, 나는 하나님께 먼저 물었습니까 아니면 결정한 뒤에 명분을 붙였습니까?
내 삶에서 "구원받아 나온 애굽"인데도 자꾸 되돌아가고 싶어지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지금 붙들고 있는 신앙적 명분 가운데 정직하게 내려놓아야 할 것이 있습니까?
오늘의 묵상을 적어보세요
오늘의 기도
진리의 하나님, 저는 명분에는 능숙하나 순종에는 서툰 자입니다. 결정하기 전에 먼저 주님께 묻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제 안의 애굽을 정직하게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두 개의 백합화
성전 입구에 두 기둥이 섰습니다. 야긴은 "그가 세우시리라", 보아스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완벽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그 기둥 머리에 얹힌 것은 놋으로 부어 만든 백합화 장식이었습니다.
천 년 뒤, 갈릴리 산기슭에서 우리 주님은 들에 핀 백합화 하나를 가리키며 말씀하십니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하필 백합화, 하필 솔로몬입니다. 주님은 지금 그 성전 기둥을 보고 계신 듯합니다.
두 백합화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첫째, 놋 백합화는 자라지 않습니다. 완성된 그 순간이 가장 아름답고 그 뒤로는 녹슬 일만 남습니다. 둘째, 향기가 없습니다. 보는 사람은 감탄하지만 아무도 그 곁에서 위로받지 못합니다. 셋째, 가장 결정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들의 백합화는 수고도 길쌈도 아니하고 오직 입히시는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요즘 조화는 잎맥까지 정교합니다. 시들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조화에는 향기가 없고, 씨앗이 없고, 물을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시들지 않는 대신 살아 있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목마르다고 말하지 않는 신앙, 그것이 가장 위험한 신앙입니다.
묵상 질문
지금 내 신앙은 조화에 가깝습니까, 생화에 가깝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께 "목마릅니다"라고 정직하게 아뢰어야 할 영역은 무엇입니까?
수고와 길쌈으로 스스로를 입히려 애쓰고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오늘의 묵상을 적어보세요
오늘의 기도
입히시는 하나님, 저는 스스로를 화려하게 꾸미느라 정작 살아 있기를 잊었습니다. 놋으로 만든 꽃이 아니라 들에 핀 꽃이 되게 하옵소서. 향기가 있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고, 무엇보다 날마다 주님께 목마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헐리신 성전, 지어져 가는 나
드디어 완공 선언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평생 모아 드린 은과 금이 성전 곳간에 쌓입니다.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잔인할 만큼 정직합니다. 솔로몬이 죽은 지 겨우 오 년 만에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모두 빼앗아 갑니다(왕상 14:25-26). 그리고 마침내 바벨론이 성전 자체를 불사릅니다.
13년 걸린 왕궁도, 7년 걸린 성전도 다 무너졌습니다. 이것이 절망의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참된 성전으로 데려가는 이야기입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주님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어 자기 이름을 남겼지만, 그리스도는 자기 몸을 성전 삼아 헐리시고 우리 이름을 살리셨습니다. 솔로몬은 재판하는 주랑을 지어 그 위에 앉았지만, 그리스도는 빌라도의 재판석 앞에 서서 우리의 판결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거할 궁을 지었지만, 그리스도는 머리 둘 곳도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을 성전 삼으십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여기서 붙들 단어는 "지어져 가느니라"입니다. 완성이 아니라 진행입니다. 우리는 아직 완공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완공된 건물은 더 이상 자라지 않지만, 지어져 가는 성전은 매일 자랍니다. 내일 우리는 다시 예배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화려한 것을 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아직 지어지는 중인 우리 자신을 들고 갑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묵상 질문
이번 한 주 묵상을 통해 하나님이 내게 걷어내라고 하신 "거품"은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아직 완공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왜 은혜입니까?
내일 주일예배를 어떤 마음으로 준비하기 원합니까?
오늘의 묵상을 적어보세요
오늘의 기도
참된 성전 되신 예수님, 무너지는 것을 쌓느라 애쓴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은 헐리심으로 저를 세우셨습니다. 이 한 주간 배운 것을 붙들고 내일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시고, 완공되지 않은 저를 주님이 계속 지어 가심을 신뢰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나는 아직 완공되지 않았다. 그래서 감사하다."
6일 묵상 완주 기록표
"솔로몬의 성전건축(3) — 솔로몬의 꿈" — 열왕기상 6:37-7:51
| Day 1 | 시간은 정직하다. 나의 달력이 나의 고백이다. | |
| Day 2 | 은혜가 액자에 들어가는 순간을 경계하라. | |
| Day 3 | 재판정의 양식이 가정과 교회를 삼키지 않게 하라. | |
| Day 4 | 하나님은 명분이 아니라 순서를 보신다. | |
| Day 5 | 조화가 아니라 생화로, 날마다 목마르게. | |
| Day 6 | 나는 아직 완공되지 않았다. 그래서 감사하다. |
이번 주 결산
이번 주 하나님께서 내게 가장 강하게 말씀하신 한 구절은 무엇입니까?
이번 한 주 묵상을 통해 하나님이 내게 걷어내라고 하신 "거품"은 무엇이었습니까?
내일 주일예배를 어떤 마음으로 준비하기 원합니까?
나는 아직 완공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